2026년 7월 11일(토)
- ‘헤어질 결심이 어렵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헤어질 결심을 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헤어지지 않을 상대에게는 헤어짐을 떠올리지조차 않기 때문에. 삶에는 끝이 있으니 종종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야 하겠지만, 사랑은 또 다르다. 어떤 관계에서나 끝은 도래하겠지만 언제나 우리가 영원할 것처럼 약속하고 기약하며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6년 7월 10일(금)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프롬은 고독감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삶에 함께 책임을 지려는 ‘사랑’이라고 보았다.
2026년 7월 9일(목)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우리는 보통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희생의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자기애에 대해 살펴보면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리하여 참으로 행복한 사람만이 남들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2026년 7월 8일(수)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사랑의 기술에서 명장이 되려는 사람 역시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가? 하루의 일정 시간을 명상, 독서, 음악 감상, 산보 등에 할당해야 하고, 가벼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도피적 활동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과식하거나 과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훈련을 외부에서 부과된 명령처럼 실행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 같은 책. 에리히 프롬의 원전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하고 의문스러웠던 - 그리고 모호한 부분이 해설서를 읽으면서는 많이 해소될 수 있어서 좋았다. 기꺼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내가 실망과 우울에 빠지지 않고 계속 사랑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냉철한 통찰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약해지며, 약해지면 점점 더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가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조차 우리가 무의식 속에서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남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믿음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이러한 믿음의 작용이다. 믿음을 갖지 못하는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
vs
2026년 7월 6일(월)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연인 사이의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기만적인 성격은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에서 상당 부분 비롯된다.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서도 자극되지만, 고독이나 불안에 의해서, 혹은 정복하거나 정복당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혹은 허영심이나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자극된다. 성적 욕망은 이렇게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사랑이 성적 결합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바탕의 육체적 관계에는 탐욕, 또는 정복하거나 정복당하려는 욕망은 없고 부드러움만이 존재한다. 육체적으로 결합하려는 욕망이 연인이 서로를 존중하는 참된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욕망은 도취적이고 일시적인 합일밖에 초래하지 못할 것이다.
연인 간의 진정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의지의 행위다. 곧 그것은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다.
오늘날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감정에 갑자기 사로잡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경우 연인 간의 사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지’라는 요소가 무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에는 적극적인 판단과 약속, 즉 의지와 결단이 개입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인 간의 사랑에서 특정한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연인 간의 사랑에서는 실로 그러한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원숙한 인격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026년 7월 2일(목)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참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주는 것이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가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풍요로워진다. 이는 그가 주는 행위에서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최고로 표현하고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실현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는 데서 큰 기쁨을 맛본다. 연인이 성관계를 할 때 그들은 서로에게 기쁨과 쾌감을 준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에게 기쁨과 쾌감을 줄 수 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긴다. 만약 상대방에게 기쁨과 쾌감을 줄 수 없다면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성은 특히 아이에게 자신을 주면서 기쁨을 느낀다. 어머니는 자라나는 아이에게 자신의 젖과 체온을 주는 식으로 자신을 준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어머니는 극심한 고통과 우울을 느낀다.
2026년 6월 30일(화)
- 지난 주 즈음부터 개인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여러 주제들을 얼렁뚱땅 추상화시켜보면 결국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내가 기꺼이 사랑을 줄 수 있고 나다울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하고 여러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대상에 관한 이야기. 어제 점심 시간에 동료 Y님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예외는 아니겠다만은) 나의 마음과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 생각했다. 상대방에 대한 연민과 동정, 고마움과 미안함, 나 또는 관계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시선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나와 같은 것들을 모두 뒤로하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향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 누군가의 삶에 개입해 영향력을 미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결론적으로 일말의 의구심이나 의아함이 들었던 것들은 결국 그 직감과 감정이 맞았었고, 그것에 대해 일러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다. 뒤늦게야 고마운 마음, 그리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한 -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 결국 내 문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풀어야 하는 것. 하지만 좀 더 현명하게 이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역시나 다시 한 번, 인생은 너무 짧다.
-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의아함 없이 계산없이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
- 연애의 상대에 대해 내가 뭔가를 ‘포기’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부터가 잘못된 서술 같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면 내가 뭔가를 포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헤어지거나.
- 박찬국의 책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중.
참된 사랑의 요소는 첫째로 사랑하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러한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두 번째 요소인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책임은 다른 인간의 잘잘못을 함께 책임지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존경’이다. 존경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통찰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으로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존경이 결여되면, 책임은 쉽게 상대방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전락한다.
2026년 6월 29일(월)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마냥 낙관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반면, 트레이더 출신의 저자 김동조는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것.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의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날수록 당신이 사랑받을 가능성은 더 낮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이 중요한 만큼 그 사람의 사랑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형편 없는 대상을 사랑한 후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건 당신의 문제다.
사이가 좋을 때 애인의 모습은 사실 애인의 내면 혹은 진짜 모습을 파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가 났을 때의 모습,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습, 다시 만날 일 없는 약자를 대하는 모습이 진짜 정보고 내면이다. 그걸 무시한다면 그게 바로 당신의 내면이다.
2026년 6월 28일(일)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돌이켜보면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의지가 나에게 있는가?’ 라는 질문이 중요했던 것 같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조금이라도 망설여졌을 때 이별했던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 디테일한 단위에서 다른 지점들이 많지만 - 사랑, 특히 배타적이고 독점적일 수 밖에 없는 성애에 대한 입장은 워런 버핏의 투자에 관한 격언과 일맥상통하는 구석도 있다. (“10년 동안 주식을 보유할 생각이 없다면, 단 10분도 그 주식을 보유하지 마라”)
-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다시 비생산적 성격의 사람이 주는 것과 생산적 성격의 사람이 주는 것을 구분하여 선을 긋는다. 비생산적 성격의 사람은 주는 것을 ‘희생’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주는 것을 미덕으로 착각한다. 반면 생산적인 성격의 사람은 주는 행위 안에서 자신의 힘과 풍요로움, 그리고 능력을 경험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느낌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을 - 기쁨, 관심, 이해, 지식, 유머, 그리고 슬픔과 같은 것들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고 말하는 데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누구를 사랑할지를 따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올바른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 가깝다.
- 성숙한 사랑은 수동적으로 휩쓸려 빠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옆에 서 있을지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희생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관계가 생명력을 죽이고 있다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떠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사랑이기도 하다.
2026년 6월 26일(금)
- 사랑하는 사람이 최선과 최고만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내게 들지 않았을 때 또는 상대로부터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는 이별을 고민해봤던 것 같다. 마음이 - 즉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에 물음표 백만 개 떴던 오늘의 점심 대화 후 든 생각.
2026년 6월 25일(목)
- 어제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마주친 글 (링크)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었다. 마음이 소진되었다고 한들, 떠나는 건 또 다른 얘기라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소진되었을때 오래 남아있는 것이 과연 괜찮으냐고 하면 돌이켜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이 기특했고, 할만큼 다 하여 일말의 미련조차 없는 상태가 마음에 들었지만, 동시에 더 빨리 결심해야 했다는 생각도 한다. 어떤 이별에는 결단이 필요했었다.
- 별개로, 몇 사람들이 달아둔 댓글도 마음에 쏙 들었다. 요새 읽고 있는 책 ‘사랑의 기술’에서의 이야기와 맞닿아있다. 사랑 또한 결심이라서.
-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보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때론 저것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것이 맞는걸까 하며 내심 의아해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의아함을 갈무리.
2026년 6월 24일(수)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인용.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때로는 이러한 ‘합일’은 서로 부끄러워하게 하거나 심지어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격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여러 문장들을 적어두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라서 따로 표기하고 싶은 인용문이 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2026년 6월 22일(월)
-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사랑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타인도 잘 사랑할 수 있는 것 같다.
2026년 6월 21일(일)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인용.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누구나 채울 수 있는 것은 외로움, 오직 한 사람만 채울 수 있는 것은 사랑.
- 개리 채프먼의 책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소개된 5가지 사랑의 언어. 예전에 질문을 받고 말 - 봉사 - 스킨십 - 시간 - 선물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나는데, 영어 키워드를 봐서 그런건지 아님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진 것인지 좀 헷갈린다. 책을 사서 봐야 하겠다.
- 인정하는 말 Words of Affirmation
- 함께하는 시간 Quality Time
- 선물 Receiving Gifts
- 봉사 Acts of Service
- 스킨십 Physical Touch
2026년 6월 17일(수)
- 아래는 모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인용.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2026년 6월 14일(일)
- 사랑이라 통칭되는 것에는 사실 수많은 세부 요소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속속들이 목격해주고 응원해주기로 다짐하고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이자 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2026년 6월 11일(목)
- 한 작가의 두 다른 짧은 만화 (링크 / 링크) 를 보며, 마음을 온전히 받고 느끼고 또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 또한 희소한 재능이고 역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마음들을 튕겨내어 왔을까.
2026년 6월 9일(화)
2026년 6월 7일(일)
- 생을 통틀어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몇 명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그 마음을 허투루 주고싶지 않다. 반대로 마음이 떠났을 때는, 애매하게 남겨두기보다 분명하게 매듭짓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2026년 6월 2일(화)
- 결혼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의 그리고 상대의 내밀한 구석까지도 관찰해줄 수 있는 목격자는 정말 특별한 존재이지 싶다.
- 바꿔 이야기하면, 나도 상대방도 서로에게 평생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어야 할테다. 과거의 연애들을 돌이켜보아도 실로 그러했다. 평생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고, 그 마음이 옅어져감을 느낀 적도 있었으니.
-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질때면, 어떤 누군가를 나는 과연 앞으로 계속 궁금해하고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26년 6월 1일(월)
- 반대로 언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는가?
- 어디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가 결국 그 사람이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요즘과도 같은 주의력 결핍의 시대에는 그에 더하여 주의력 또는 집중력을 추가해야 할 수도 있겠다 싶다.
- 그런 관점에서 누군가가 나를 궁금해할 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물어봐줄때, 먼저 연락할 때, 기꺼이 만나자고 청하고 또 시간을 낼 때, 그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내가 상대방에게 그러한 것처럼.
2026년 5월 28일(목)
-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녀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제넘는 일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한국에서의 연애 관계는 서로를 너무 간섭하고 불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다 큰 성인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그 자체에 대해 허락을 받고 허락을 하는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가 싶은 것이다.
- 신뢰를 쌓아가는 형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누군가를 믿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 내 경우에는 노래보다도, 어떤 영화와 드라마들이 남곤 했다.
2026년 5월 27일(수)
- 예전에 읽고 인스타그램(링크)에 올려두었던 문장들. 근본적으로 동기의 방향성과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어야 비로소 관계를 시작할 수 있고 또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결혼은 특별한 제도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짜 선호가 무엇인지 털어놓게 만든다. 결혼은 한 명과 하는 것이고 결혼을 하는 순간 다른 무수히 많은 대안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는 순간만큼은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은 그 시점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상대와 결혼한다. 따라서 전혀 이질적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두 사람이 결혼하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의 가치는 정확히 같다.
결혼은 위험한 제도이다. 평생의 사랑을 맹세하고 결혼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이혼이란 옵션을 가진다. 사람들이 이혼을 결심할 때는 이혼이란 옵션의 가치가 높아질 때다. 두 사람의 가치는 결혼 시점에서 등가를 이루고 그 이후로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춤을 춘다. 나의 가치가 상승하고 상대의 가치가 하락할 때 이혼이란 옵션의 가치는 상승하고 그 격차가 현격할 때 사람들은 이혼을 결심한다. 따라서 배우자가 발전하고 성장할 때 내가 그(녀)의 발전과 성장과 상응하는 발전과 성장을 이루지 않으면 내 결혼의 안정성은 심각하게 위협 받는다. 물론 이혼이란 옵션의 행사에는 일정한 비용이 든다. 자식이 받을 심리적 충격도 감안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공동으로 이룬 재산을 분할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이 모든 비용을 감안해도 이혼의 옵션 가치가 급등하면 인간은 이혼을 선택한다. 심지어 이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번민과 새로운 선택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찬다. 이런 상태로는 행복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배우자의 성장과 발전은 축하할 일임이 분명하지만 내가 그만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다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결혼은 모순적인 제도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하지만 결혼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삶은 아슬아슬해진다. 누군가는 성장하고 누군가는 퇴행하기 때문이다. 성장과 퇴행이 반복되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행복의 완충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성장이란 미덕은 사랑을 훼손한다. 상대의 성장과 퇴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랑은 훼손되고 결혼은 결국 불행으로 치닫는다. 결혼은 깨지거나 유지되더라도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만족보다 자신이 내리지 않는 선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삶은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하는 순간 행복의 조건은 사랑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관리하는 데서 완성된다. 나의 성장뿐 아니라 상대의 성장까지도 신경 쓰는 세심함이 필요한 것이다.
- 김동조,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2026년 5월 24일(일)
- ‘굳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2026년 5월 23일(토)
- 일본어에는 코이 노 요칸(恋の予感)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직역하면 사랑의 예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미리 예감하는 감각.
2026년 5월 21일(목)
- 누군가와 떨어져 있을때면 그 사람이 뭐하고 있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궁금할때, 아아 어느새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결국 타이밍이 - 내가 그리고 상대방이 어떤 상태이고 상황인지가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타이밍을 기다리거나 만드는 것 또한 의지이고 역량이라고 믿는다.